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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산책

이런 멘토 더 없습니다. 「다산의 마음」 정약용 지음, 박혜숙 편역

 

 


다산의 마음

저자
정약용 지음
출판사
돌베개 | 2008-06-3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우리고전 100선 시리즈의 11권으로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처음 다산 선생을 접한 것은 학창시절이다. 국사문제를 하나라도 더 맞추려고 정약용 목민심서 정약용 목민심서 하며 선생의 이름을 외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중기와 배다리를 만들었다고 했고, 무슨 책을 500권이 넘게 썼다고도 했다.

 

당시에 생각했다. 아 나하고는 동떨어진 곳에 살다가신 양반이구나. 위대한 우리 민족의 스승이자 세계적으로 뛰어난 학자라는 것은 알겠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의 감흥은 내게 없었다.

 

수 년이 지난 후 강진의 다산 초당을 갈 기회가 있었다. 물론 관광이었다. 강진. 참 멀기도 했다. 다산 초당까지 가는 길도 멀었다. 도착해서 본 다산 초당은 허전하기만 했다. 뭐 이런 곳을 관광지라고 만들어 놨나 싶었다.

 

하지만 위대한 우리 민족의 스승이 머물던 곳이라 하니 존중심을 가지고 무엇인가 근엄한 기운을 느껴보려고, 혹은 그런 것을 느끼고 있다는 모습을 내 비춰보려고 했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몰상식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주고 싶지 않았던게 그런 행동의 가장 큰 이유였다.

 

다산 초당 구경을 마치고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곳에 다녀왔다 라는 것이 전부인 기억이었다. 어따 이양반 공기 좋은 곳에서 사셨구만~ 나도 이런데서 한가하게 좀 살아봤으면 좋겠네~ 뭐 이런 생각이나 했었던 듯 하다.

 

그렇게 선생은 내게 그저 먼곳에 하나의 관념으로 존재하는 인물이었다. 훌륭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나와는 아무런 직접 관련이 없는 그런 존재로 말이다. 그러던 중 최근 다산의 독서법에 대한 책을 한권 읽었다. 권영식이 쓴 「다산의 독서전략」이라는 책이다.

 

아니 근데 이럴 수가? 다산이 가지고 있는 정밀하고 곱고 곧게 다듬어진 삶의 철학, 학문에 대한 자세가 매우 놀라웠다. 여태 이런 사람을 모르고 지내왔다니 아이고 이런 막심한 손해가 있나.

창고에 수십억 재보를 쳐박아 두고 라면만 끌여먹고 살아온 것 같은 심정이었다.  

 

전반적으로는 다산의 학문법을 분석해서 독서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었지만, 다산의 삶을 한 챕터에 요약해두었고, 책의 중간중간에 선생의 한마디를 삽입해 두었다. 그런데 그 글들이 가슴에 콱콱 박히는 것이었다.

 

학교 선생들은 대체 뭐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이런 위대한 스승을 그저 시험문제거리로 전락시켜버리다니. 뭐 학생 시절에는 다산 선생의 글들을 누가 설명해 준다해도 꼰대 잔소리로 들렸을지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이런 인물과의 첫만남이 시험문제 여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정약용 목민심서를 외우는 것으로 만족케 했던 제도권 교육과 내게 한마디 했다. 멍청이라고.

 

갑자기 갈증이 생겼다. 다산 선생의 다른 글들을 읽어보고 싶다. 그런데 무슨 책을 읽지? 내가 한자로 된 목민심서나 경세유표를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인데, 그렇다고 누군가 해석해놓고 주석을 달아놓은 학술서를 읽고 싶지도 않았다.

 

선생의 숨결, 생각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다. 다른 이가 뭐라고 정의 내려버린 선생의 학문에 대한 글이 아닌 생 것으로의 다산 선생을 느껴보고 싶었다. 그래서 찾은 책이 「다산의 마음」이다. 일종의 수필. 수필에는 그 사람 본연의 모습이 담기는 법이잖은가. 삶의 선배, 스승으로서의 다산을 만나고 싶었기에 택한 책이다.

 

내가 한자를 잘 알아 선생이 적은 원문을 읽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런 능력이 되지 않다보니 박혜숙이라는 편역자가 손질해 놓은 책으로라도 만족하기로 한 것이다.

 

편역자가 친절하게도 주제별로 글을 골라 분류해놓았다. 성찰, 이웃, 가족, 감성 하는 식으로. 편한 마음으로 읽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술술 읽을 수가 없었다. 어려운 내용도 아니고 긴 분량의 글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선생의 생각과 만난다는 그 긴장, 선생이 남긴 예리한 통찰과 잘 다듬어진 감정이 녹아 있는 글들을 쉽게 슥슥 읽어 넘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걸 다 외워버릴 수는 없지만 최소한 한번 읽고 잊어버려서는 안될 성 싶었다. 한문장 읽고 생각하고, 한문장 읽고 생각하기를 반복했다.

 

스스로를 성찰하는 선생의 글에서는 내 자신의 부족함과 어리석음에 부끄러웠고, 자연에 대한 감상과 삶 속에서의 작은 즐거움을 말하는 글에서는 묘한 편안함과 그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에 잠기기도 했다. 아비된 이로서 자식을 먼저 보낸 슬픔을 토로하는 대목에서는 선생의 정제 된 문장 속에 담긴 격렬한 고통에 가슴이 메어왔다.

 

6남3녀중 4남2녀를 잃었다고 하니 이 무슨 참변인가. 전염병인 마마로 잃은 딸을 그리워하는 아비가 쓴 글에는 목적지를 잃은 원망과 애절한 슬픔이 배어나왔다.

 

다산 선생은 "책 한권을 읽으면 그만큼 백성의 삶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선생이 지은 「마과회통」은 마마를 치료하는 법에 대한 의술이 정리된 책이라 한다. 자식 잃은 아비의 슬픔과 학문에 대한 다산의 자세가 만나 탄생한 결과물일 것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고 나니 선생이 지은 책 목록의 한권 한권이 예사롭지 않다. 그 책 속에도 학자로서의 냉철함만이 아니라 선생의 슬픔과 애정, 고뇌가 담겨 있는 것 아니겠는가 말이다.

 

다산 선생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을 하도록 만든다. 실제로 선생이 말한 것은 독서에 대한 것이지만 다산 선생에게 있어 독서는 삶을 살아내는 방법이었다.  그런 선생이 말하는 독서이기에 단순히 책읽는 것을 뜻하는 것에 한정하여 해석할 수가 없다.

 

“독서하는 사람은 반드시 근본부터 세워야 한다. 근본이란 무엇인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으면 독서를 할 수 없다. 학문에 뜻을 둔 사람은 반드시 근본부터 세워야 한다. 근본이 무엇인가? 효도와 공경이다. 먼저 효도와 공경을 힘써 실천하여 근본을 세운다면 학문은 자연히 넉넉해진다. 학문이 넉넉해지면 독서의 단계와 세목을 따로 말하지 않아도 된다.”

 

왜 행동하는가. 나의 행동을 유발하는 근본은 무엇인가. 선생의 글에서 학문과 독서를 삶과 행동으로 치환해 읽어보면 새로운 질문에 다가서게 된다. 얄팍한 목표를 위한 독서는 학문을 이룰 수 없다. 무의미하다. 눈앞의 현실을 쫓는 근시안적 행동 역시 삶을 이룰 수 없는 무의미한 행동이다.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나의 근본은 무엇인가.

 

평생의 절반을 유배지와 고향에 칩거해 보내면서도 가슴 속에는 '효도와 공경'을 품고 백성에 대한 걱정과 사랑으로 글을 읽고 책을 써낸 다산 선생. 그 모습이 현대를 사는 내게 쓰라린 회초리가 된다. 내 가슴속에 든 것은 무엇인가. 난 무엇을 가지고 세상을 사나.

 

흔히들 나는 누구지? 나는 왜살지? 하는 질문을 사춘기에나 하는 부질없는 것으로 취급하곤 한다. 나이들만큼 든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한다하면 다들 웃는다. 아마도 그 나이면 그런 질문에 답은 이미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보다.

 

간혹 그럴듯한 대답을 하나쯤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긴하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본다면 제대로 된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략 100명중에 99명은 말이다. 먹고 싸고 자고 울고 불고 싸우고 하긴 하는데 그것을 하는 이유가 뭔지 도무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산 선생은 그 이유가 확고했다. 효도와 공경. 이것이 원문에 뭐라고 적힌 것을 효도, 공경으로 번역했는지 모르겠으나 다산 선생이 단순히 부모를 향하는 효도와 어른을 향하는 공경을 뜻하는 말로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의적인 해석이지만, 세상과 백성. 애처로운 모든 이들을 향하는 사랑을, 부모에게 효하듯 어른을 공경하듯 하라는 표현으로 대신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다산 선생은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선생의 글을 읽는 이들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말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왠지 괴로웠다. 다산 선생의 스산한 인생살이의 아픔에 대한 공감 때문이기도 했고, 스스로의 삶에 대한 돌아봄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의 본 모습과 마주하는 것은 어찌나 괴로운 일인지. 하지만 자기 실체와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잘못된 선택과 후회가 쌓여갈 뿐이다.

 

팍팍한 삶, 뭔가 재미도 없고 비어있는 삶을 살고 있다면 다산 선생과 차한잔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선생과 마주 앉아 보면, 내 삶의 근본과 앞으로 살아갈 모습에 대해 생각.. 아니 뭐 거창하게 그리 표현할 것도 없다. 그저 뒤통수에 떵 하고 울리는 충격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조만간 다산 초당을 다시 찾아야겠다. 근처에 선생이 머물던 '사의재'도 있다고 하니 그곳도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사죄하고 감사해야 겠다. 그동안 몰라봐서 죄송하다고, 그리고 앞으로 선생이 남긴 정신을 바탕으로 조금 더 사람답게 사랑하며 살아보겠다고 말이다.

 

 

 

 

사의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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