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치 있는 대사.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는 조연.
무게있는 메세지.
1933년 일제강점기 민족말살정책이 시행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 「암살」.
조선인을 살육하는 만행을 주도한 일본군 장교와 그의 권세에 빌붙어 사는 조선인 친일파를 제거하기 위한 암살조의 모습을 그려낸다.
▲ 일본군 장교 카와구치 마모루와 친일파 강인국 암살을 위한 암살조.
죽음을 각오해야하는 임무에 투입되며 각서를 목에 건 채 웃고 있는 모습이 묘한 감정의 충돌을 일으킨다.
처음에는 출연진에 대한 정보 없이 상영관을 찾았다. 전지현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정도만 알았는데. 그런데 이게 뭐지?. 이런 호화 출연진이라니. 주연을 맡았던 배우들만 해도 하정우 이정재 조진웅 조승우 까지. 그 외 조연 출연진도 ㄷㄷ 이다.
▲ 「암살」의 주연을 맡은 하정우(하와이 피스톨 역), 전지현(안옥윤 역), 이정재(염석진 역).
'암살'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단체에 대해 개략적으로라도 알고 있다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영화다. 영화에 직접 언급되는 조직인 상해 임시정부, 의열단, 신흥무관학교. 그리고 김좌진장군의 청산리전투와 이 조직간의 관계와 전후 결과. 또 그외 난립했던 수많은 단체들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한단계 위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인물간의 관계와 전투씬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관람이 아닌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물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극중 염석진(이정재)이 "돈 줄이 다르니 서로 단합이 안되지. 결국 모두 도둑놈들이야." 투의 말을 하는데, 당시 난립해있던 독립운동단체의 현황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흘려듣고 말 수 있는 이 대사가 조금 더 뇌리에 남게 될 것이다.
▲ 실감나게 재현된 1930년대 경성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암살'의 또 다른 재미다.
민족의 암흑기를 배경으로 하지만 기본적으로 취하는 틀은 오락영화다. 마치 영화 「놈놈놈」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놈놈놈'은 시대배경만 일제강점기 일 뿐 독립전쟁과는 무관한 인물들이 벌이는 활극인 반면, 「암살」은 오락영화로 치부하기에는 담겨있는 메세지에 무게가 있다.
'암살'에서는 친일파 염석진이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처음에 그는 김구 선생 밑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죽음을 앞에 둔 상황에서 일본 순사의 회유로 일제의 밀정이 되고 그 후 중요 정보를 일제에 제공하며 반민족 행위를 일삼는다.
암살조의 표적 중 한명인 조선인 친일파 강인국.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일본군 장교를 구해내며, 독립군에 협조하는 자신의 아내를 죽이고 훗날 자신의 딸마저 사살한다. 그에게 존재의 이유는 출세였고, 그 방법이 일제의 인정을 받아 그 그늘에 머무는 것이었다.
▲ 기득권 유지를 위해 친딸마저 사살하는 냉혹한으로 등장하는 친일파 강인국(이경영 분)
위에 언급한 두 사람은 최후의 순간에 이렇게 말한다.
"이게 다 조선인을 위해서 였다. 무지한 조선인을 구해야 했어." - 강인국
"이렇게 빨리 독립이 될 줄 알았나, 알았으면 안 그랬지." - 염석진
일제와 그 편에 선 자들이 득세하는 시대였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제의 편에 서야만했다는 말이다. 입장과 표현에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둘 모두 시대의 흐름에 따른 것이라는 자기 변명이다.
실제로 일제강점기가 길어지면서 조선인 내에서도 조선총독부 관직에 대한 인기가 높아졌다. 어쨌건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집단인 총독부에서 근무하는 것이 당시의 시대에는 출세이고 꿈을 실현하는 길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른 자와 친일파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본질적인 동기와 그가 보인 행동에 대한 통찰로 그 차이를 간파할 수 있다.
친일파는 기본적으로 기회주의자라는 프레임에서 해석된다. 자신이 위치한 상황에서 어느 줄에 서는 것이 가장 높은 효율을 낼 수 있는 가에 따라 움직였던 사람들인 것이다. 즉,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민족을 배신하고 일제의 앞잡이가 된 자들이다.
반면, 시대의 흐름을 따른 사람은 일제가 구축한 사회제도에 순응했다는 점에서는 친일파와 공통점을 갖지만, 그 선택은 어디까지나 민족을 위한 것임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 친일파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일제강점기에 경찰과 군대에 종사하던 거의 모든 이들이 해방 후 대한민국의 경찰과 군인이 되었다. 시대에 순응한 자들이 있었기에 해방 후 빠르게 자립적인 조직 구축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니 일제의 조직에 근무했다는 것 자체로 민족을 배신했다는 낙인을 찍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그들 중 친일 행위를 한 이들이 상당수 섞여 있다는 것이 한국 근대사에 비극으로 남아있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과거 청산이 명확히 이뤄지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친일 행위를 한 자들과 시대에 순응한 이들에 대한 구분과 검증 작업이 필요한 이유다.
▲ 암살조장 안옥윤. 결국 그녀가 암살 임무를 완수해낸다. 1인 2역을 소화해 낸 영화의 히로인 전지현.
전지현은 역시 무거운 역할 보다 발랄한 역할이 더 어울린다. 안옥윤 보다 미치코가 어떤면에서는 더 매력적이었다;
다행히(?) '암살'에서는 그 검증과 청산이 이뤄진다. 친일파 염석진은 해방 후 고위 경찰로 근무한다. 염석진은 누군가의 투서로 인해 반민족행위혐의로 재판장에 서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친일 행위를 한 것이 아니며 시대의 흐름을 따랐을 뿐인 독립투사였다 주장하고, 증인이 살해되어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아 낸다.
허나 재판장을 나온 염석진은 그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던 이들에 의해 제거 된다. '암살'을 통틀어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이었다. 살해 장면을 마음에 든다고 하기에는 잘못이 있지만, 암울하고 억울하기만 하던 시절에 비열한 기회주의자가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는 장면에서 조금이라도 위로를 얻었다고 할까.
어떤 이들은 염석진이 처단 되는 장면이 아닌 안옥윤이 끝내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 장면이 나왔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야 관객들이 끝내 살아 남아 부귀영화를 누리는 염석진을 보고 그 비열한 친일행위에 강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역시 일리있는 견해이다. 하지만 '암살'은 어디까지나 오락영화인 만큼 통쾌함을 주는 결말이 더 어울렸으리라 생각한다.
▲ 돈을 좇는 살인청부업자였지만 후에 암살에 합세하는 하와이 피스톨. 그의 심경이 변화된 이유는?
'암살'에 대해 일부 평론가들은 그다지 후한 점수를 주지않고 있다. '최동훈 감독의 전작들과 비슷한 구성을 취했다. 일부 배우의 존재감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등장 배우에 비해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는 등의 이유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완성도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어느정도 비판적인 평론가의 의견에 동의한다. 영화 중후반에 잠시 느껴지는 지루함, 다소 비현실적인 총격신(액션 영화가 대개 그렇지만..), '속사포'가 결혼식장에 잠입하는 비상식적인 과정에서 느껴지는 현실과의 괴리감 등에서 그렇다.
하지만 재치있는 대사가 속속 튀어나오고 전반적으로 유머러스하고 쾌활한 액션 영화다. 특히 암울한 시대를 다루고 있음에도 이야기 진행이나 결론은 암울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 오락영화로써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모든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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